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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사람이 가장 큰 자원입니다

 

핀란드는 경제 위기를 겪고 절치 부심끝에 국가경쟁력 1위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바로 무상교육을 대표되는 성장과 분배를 통한것이었습니다.

 

                  


              [핀란드의 성공배경]

 

1991~1995년 핀란드는 소련 경제 붕괴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1990년부터

4년 내리 마이너스 성장(-0.4~-6.2%)을 기록했다. 국민소득은 2만7000달러에서

1만7000달러로 추락했다. 그 핀란드가 지금 국민소득 4만달러, 교육경쟁력·

국가경쟁력 세계 1위 국가로 올라섰다.

 

핀란드가 위기를 재도약으로 반전시킨 첫째 비결은 과학기술 육성이다.

1992년 1.7%였던 GDP 대비 연구·개발비(R&D)가 지금은 3.5%로 스웨덴에

이어 세계 2위다. 특히 정부 R&D 예산의 51%를 미래 성장 엔진인 정보통신

분야에 집중시켰다.

 

핀란드 정부는 기업·대학·연구소를 한데 모은 과학기술단지(Science Park)를

17곳 조성해 유기적 산(産)·학(學)·관(官) 협력시스템을 구축했다.

 

세계적 기업 노키아가 있는 울루과학기술단지의 경우 구내식당을 대학·연구소·

기업의 한가운데에 만들어 기업인·교수·학생이 늘 교류하게 했다.

 

두 번째 비결은 작년 12월 OECD 국제학력평가(PISA)에서 읽기 2위,

수학 2위, 과학 1위를 차지한 교육경쟁력이다. 인구가 500만명밖에 안 되는

핀란드는 '사람이 자산(資産)'이라는 국정 철학 아래 교육에 역량을 집중시켰다.

 

.

 

 


                 [핀란드 교육의 성공배경]

 

             핀란드 교육의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교육이라는 이름의 보트를 탄 아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물에 빠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핀란드는 14개국 중에서 생산성 증가와 인적 자원개발 지원 항목에서 최고점을

획득했다.

 

핀란드 교육이 이처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을 받는 이유는 최고 수준의

교육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핀란드 교육시스템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출신과 경제적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무상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다양한

성인교육기관들이 활성화되어 평생교육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다.

 

부정부패 없는 청렴한 정치 문화도 이러한 교육시스템이 정착하고 변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핀란드 교육의 성공 뒤에는 평생교육의 큰 틀에서 인적자원 개발에 투자되는

엄청난 규모의 교육예산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예산의 약 14%를 교육 분야에 할당하고, 국내총생산의 7%를

공교육비로 지출하고 있다. 수업료, 급식비, 교재비까지 모든 교육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돈이 없어 공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사교육을 담당하는 학원이 없는 것은 물론, 과외도 피아노 등 예술분야에 한해

소수만이 받을 뿐이다. 20여 개의 대학 모두가 정부의 소유이며 정부가 모두

재정을 부담하여 무상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종합기술전문학교들은 산업현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매년 약 100만 명의 핀란드 국민이 성인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 5명 중 한 명꼴로 국가가 공짜로 시켜주는

직업교육을 받는다. 평생교육의 큰 틀에서 교육시스템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는 교육철학도 당연히 남다르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공동체

시민으로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핀란드 교육의 목표이자 철학이다.

 

지역, 성별, 빈부격차에 관계없이 평등한 교육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철학 덕이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학교들에는 복지담당관, 심리학자,

특수교사들이 배치돼있어 학생의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 발달을 체크하면서

학생들의 학습과 어려움을 진단하고 해결해 주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학력성취

수준에 따른 지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1등과 꼴찌에 상관없이

이런 교사들의 개별지도로 공평한 수월성 지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에 대해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영어교육이다

.핀란드의 영어경쟁력은 영어몰입교육보다도 오히려 모국어 교육의 토대

위에서 이룬 성과이기 때문이다.

 

핀란드가 가장 중시하는 교육은 읽기다.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 교육법과 습관화된 독서, 높은 도서관 활용 시스템으로

읽고 쓰는 능력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길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어렸을 때 모국어인 핀란드어를 완전히 학습하였기에 다른 과목도 자신감 있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핀란드 교육의 성공 배경은 바로 우수한 교사들이다.

“Teachers, teachers, and teachers”로 요약될 정도로 우수한 교사의 확보와

교사의 질을 높이는 교사교육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대우가 자리 잡고 있다.

교사가 국가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수업과 평가에서 자율권을 행사하면서

자율적인 경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

 

첫째,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평등한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7세부터 16세까지 학생들을 선별하지 않는 종합교육이 실시된다.

 

이렇듯 다양한 학력을 가진 학생들에게 개별화된 수업을 실시하기 위해 핀란드는

학급당 평균 학생수를 16명으로 유지해 학생 개개인이 소그룹 안에서 교사의

지도를 직접 받게 한다.

 

9년제 기초학교, 3년제 고등학교 혹은 직업학교, 이후 대학교 혹은

고등직업전문학교와 평생교육 등 일련의 교육제도는 여러 방면으로 배움의 길이

열려있어서 언제나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제도화되어 있다.

또 취직한 후에도 유급이나 휴직을 통해 공부할 시간을 보장하고 있다.

 

“우열 방식이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둘째,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는 것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

본인의 장래는 스스로가 결정해간다.

 

시험 점수는 통과 의례 중 부분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으로

미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자기평가’에 익숙한

아이들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찾아서 채운다. 교사 역시 절대평가로 평점을

내며, 이는 선별을 위한 것이 아닌 그야말로 아이들의 학력 향상을 위한

평가다. 따라서 핀란드의 아이들은 당장의 평가보다 좀 더 장기적인 인생을

설계하면서 생활한다.

 

“교사는 윗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조사를 당하는 일도 없고 정부 관료들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가르칠 자유가 보장된다.

게다가 주위로부터 높이 평가받으며 존경받고 있다.”

 

 

셋째, 학교 교육이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도록 교사를 전문가로서 신뢰하고

교사가 일하기 쉬운 직장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가르치는가는 전적으로

교사가 정한다.

 

교사의 질은 높다. 그리고 교사가 되는 길은 좁다. 교사직 희망자의 10%에

불과한 인원이 교육계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으며 채용되는 숫자는 훨씬 더

줄어든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석사학위가 필요하며 국가 차원에서

통일적인 교사 양성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핀란드의 학교는 잘 못하는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데 힘쓰지,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놔둬요. 글쎄 잘 하고 있으니까.”

 

 

넷째, 교육받을 권리를 복지 정책으로 보장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수업료는 무료일 뿐 아니라 고등학교까지는 교재나 교구(노트, 연필 등의 학용품),

급식, 통학 요금 등 여러 방면의 학습 환경이 무료로 제공된다. 또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의 하숙비도 지원한다. 학력 향상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아이들이

만족하는 충실한 학교생활을 주요 교육 과제로 삼고 있다.

 

 


 

      [ 실패한 영국식 교육제도를 채택한 이명박 정부 ]

 

학교별 성적공개로 공교육에 경쟁을 도입하겠다는 지금의 교육정책은 특목고

확대로 인한 교육양극화와 사교육비 증가, 학벌사회를 조장한 교육현실을

은폐하려는 것이다.

 

 

■ 실패한 영국의 교육정책

   

1967년,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은 영국은 1980년에는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수월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쳤다.

 

 공공부문 민영화 등의 경제정책의 결과는 사회양극화를 가중시키며,

1979년 이래 처음으로 전국 아이들의 33퍼센트가 최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영국정부는 경제침체의 원인을 교육정책의 실패로 돌리고 19번이나

교육법을 개정하면서 학부모의 학교선택권, 학교자율화, 학교 간 경쟁을 도입했다.

 

특히 학교 간 성적 순위표 공개와 학업성취도 평가는 학부모들의 학교선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결국 부동산 가격에 따른 학군의 양극화와 입시명문

학교를 찾아 나선 백인들과 중산층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교육시장은 힘없는

빈곤층에게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사립학교는 거대한 학교시장이 되어 학벌세습의 통로가 되고 있고,

학교 서열화로 인해 경영난과 학업실패를 반복하는 공립학교는

존폐위기에 내몰리는 처지에 있다.


 

 


 

http://home.ebs.co.kr/jisike/content_mov_detail.jsp?enc_seq=3037147&command=vod&chk=T&client_id=jisike&menu_seq=1&col=lecture_name&str=핀란드&order=1&order_direct=desc&cate_div=main&&curPage=1

Posted by 지오별

[오마이뉴스 강인규 기자]대학에서 뉴미디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기술이나 혁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관점으로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최근 들어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애플의 아이폰과 닌텐도의 게임기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윗분들'의 훈계 속에 양념처럼 들어가기 시작한 '유행어'기도 하다.

당사자가 의도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기술과 사회의 관점에서 '우린 이런 거 왜 못만드냐'는 물음은 상당히 전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꼴이냐'고 묻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는 그가 몸담은 조직과 그 조직을 포함하고 있는 국가 모두를 의미한다.





애플 사의 오랜 모토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다.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평가 받는 애플의 저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훈이다. 위계적인 기업의 문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윗사람'의 생각이라면 특히 더.

ⓒ Apple


못 만드는 이유?

결론부터 말해 보자. 흔히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이런 거 왜 못 만드느냐'고 묻는 것은 질문자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만들자'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들이다. 조직에서 가장 강한 권력과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묻는 지도자가 많을수록 그걸 만들어 낼 가능성은 낮아진다.

두 번째는 이런 질문을 태연히 던질 수 있게 하는 위계적 사회구조다. 위계 사회에서 '왜 못 만드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질타이고 추궁이며 명령이다. 여기서 자신의 책임은 빠져있다. (자기는 방법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계적인 조직일수록 소통은 막혀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직된 소통구조 속에서 창의력이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린 왜 못 만드냐'는 질문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조직이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 수 없을만큼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게 두 번째 답이다.

봉건적 위계사회의 비극

애플이 동기가 된,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은 사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 물음은 반성과 각성에 가까웠다. 왜 애플같은 회사가 일본에서는 태어날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혁신과 첨단기술의 대명사가 된 나라에서 말이다. 그 쟁쟁했던 소니, 도코모, 토요타의 일본에서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주목할만한 답변마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나왔다. 2008년 2월 25일자 < 뉴스위크 > 가 '애플이 일제가 아닌 이유'를 설득력 있게 분석한 것이다. 크리스찬 캐릴 기자는 "창의력의 빈곤은 일본의 독특한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수직통합된 대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위계적 경제환경에서는 융통성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계적 조직에서는 반대가 불가능하다. 반대가 불가능한 곳에서 창의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창의성은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위계적 기업문화가 재계를 넘어 정치, 교육, 문화의 모든 영역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가 단일 기업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일본 주식회사(Japan Inc.)'로 전락한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반대가 불가능하면 밖에서 반대를 해 주어야 한다. 국민이, 언론이, 대학이, 정부가 말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기업조직의 일부가 되고 나면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 '회장님' 좋아하는 언론이나,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는 사회와 기업 모두에 해가 될 뿐이다.

하물며 정치 지도자가 '국가 CEO'를 자임하거나, 기업이 대학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나라에서 희망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아이패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기업으로서의 애플이 갖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애플은 변함 없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 공개자료


애플과 인문학의 관계

현재 한국 교육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통폐합'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예컨대 음악과 미술 수업을 '통폐합'하고 (이런 '창의적 발상'이 가능한 나라에서 아이폰이 안 나온 게 놀라울 뿐이다),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5분으로 '통폐합'하고, 대학 전공을 "사회 변화의 요구에 따라" 절반 수준으로 '통폐합' 하겠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노는 시간'을 없애고, '돈 안 되는 전공,' 즉 인문학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 뒤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승인과 지지가 있다. 정부는 이런 '교육개혁'을 주도하면서 '창의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야심찬 "한국형 스티브 잡스 양성계획"도 나왔다. "탈락시스템에 따라 3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쳐" 10명 안팎의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선발할지 모르지만, 대단한 '스펙'을 갖춘 실력자들이 몰려들 게 틀림 없다(조롱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지원해도 탈락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쩌나. 스티브 잡스는 한국 정부가 그렇게 없애고 싶어하는 두 골칫거리의 산물이니 말이다. 바로 '인문학'과 '노는 시간'이다.

지난 1월,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아이패드'를 선보인 날이었다. 그는 애플 사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대형 스크린으로 표지판 사진을 보여주었다. 교차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판이었지만, '길 이름'이 독특했다. 서로 엇갈린 두 개의 표지판에는 '인문학(Liberal Arts)'과 '기술(Technology)'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의미를 설명했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입니다. 애플은 언제나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해 왔지요."






미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인문/예술/사회과학 프로그램 웹사이트. "위대한 사상이 세계를 바꾼다"는 표어가 보인다. 하프를 연주하는 사진 오른쪽에 "컴퓨터는 음악이론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음악과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킨 최신 연구들을 소개하고 있다.

ⓒ MIT


'미국식 교육'의 중심은 인문학

'미국식 교육'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식 교육을 '돈 되는 실용교육'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역과 규모를 막론하고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학의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인문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첨단 기술연구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공대(MIT)는 훌륭한 철학, 언어학, 문학, 예술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미국 대학의 전통은 크게 두 축이 있다. 연구중심 종합대학과 학부 중심의 인문대학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종합 연구대학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라 불리는 학부 중심 인문대학에서 더욱 큰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오바마 대통령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기기 전 '옥시덴탈 칼리지'라는 학부 인문대학을 다녔다. 비록 한 학기만에 그만 두기는 했으나, 스티브 잡스가 다녔던 '리드 칼리지'도 학부 중심 인문대학이었다. 그는 청강으로 들었던 서예수업을 '생애 최고의 수업'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생애 최고의 선택'으로는 '학교를 때려 치운 것'를 꼽았지만 말이다(게다가 대학 졸업 축사에서 이 말을 했다).

미국 대학이 '리버럴 아츠'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뭘까? 크게 세 가지다. 커뮤니케이션(소통) 능력, 비판적이고 윤리적 사고,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교양.

미국에서 인문교육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무 지식이나 실용적 기술'의 반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가 싫어하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인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온 교육'을 성공 비결로 내세운 것이다.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 칼리지. 학부 중심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가르치는 미국적 전통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가운데 하나다. 스티브 잡스는 이 학교를 한 학기 동안 다닌 후 자퇴했다.

ⓒ 공개자료


인문학, 왜 중요한가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실용주의가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왜 '돈 안 되는' 교육이 대접을 받는 것일까? 간단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돈만 되는 게 아니라,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육은 '고전 교육'이다. 고전(classic)이란 세월이 흘러도 의미를 잃지 않는 인류의 성과물을 말한다. 실무용 지식과 기술은 하루가 멀다고 변하지만,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의 가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적 기초가 있는 사람은 실무 지식도 쉽게 배운다. 쉽게 배울 뿐 아니라, 제대로 배운다. 제대로 배울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올바로 쓸 줄 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교육을 투자에 비유한다고 하자.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

지금 한국의 기업과 정부와 대학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실무적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장하는 '대안'은 죽어가는 인문학을 뿌리까지 없애고 그 자리에 단편적인 실용지식과 기술을 채워 넣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인문학에 존경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미래 경쟁력의 토대인 창의력까지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적 비판 능력은 '남과는 다른 생각,' 즉 창의력의 토대가 된다. 인문학이 강조하는 윤리의식은 배려와 협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에서 애플이 나올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다.





< 와이어드 > 지는 2009년 6월호 표지기사를 통해 소셜 미디어 혁명을 다루면서 '신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온라인상에서 펼쳐지는 협력과 공유 운동이 경제모델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와이어드 > 는 이 새 경제모델을 "신 신경제(New New Economy)"라고 이름 붙였다.

ⓒ Wired


경쟁교육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유치원생이 영어공부 하느라 놀 시간이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무한 경쟁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아파트 난간에서 몸을 던진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자본주의는 경쟁체제이고, 경쟁을 권장해야 '선진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만큼, 이런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국가 지도자가 '선진 인류국가'와 '선진국 문턱'을 말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이런 무엄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젠장, 그 문턱은 길기도 하다…."
유치원 시절에 듣던 '선진국 문턱' 이야기를 중년이 다 되어서까지 듣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장담컨대, 내 생전에 한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비관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정부가 말하는 '선진국'은 다가서면 사라지는 신기루다. 당나귀 머리 앞에 달아놓은 당근. 주인을 태운 당나귀는 당근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걷지만, 죽는 날까지 당근을 입에 대지 못한다. 그 당근은 새 당나귀의 머리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 비관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부가 말하는 '경쟁교육'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경쟁 교육은 나누고 배려하는 사람을 배출하지 못한다. 한국식 경쟁 교육에서 앞서가는 '비결'은 빼앗고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리눅스, 위키피디아, 플리커, 앱스토어, 트위터, 페이스북의 성공에서 보듯, 뉴미디어 시대에서는 '나눔'과 '배려'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 와이어드 > 는 이처럼 협력에 기반한 미래의 공동체 경제를 '신사회주의(New Socialism)'라 부른다. 내가 나누면 남도 나눌 것이고, 공동체는 번영하게 된다.

모든 것을 떠나서, 서로 밟고 밟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이 높고,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이유다. 아이폰을 왜 못 만드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경쟁체제를 유지하다간 '한국형 잡스'나 '선진 일류국가'보다 사회 붕괴가 먼저 찾아올 것 같으니 말이다.

Posted by 지오별

한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실력은 비교대상 국가 중 늘 2~4위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등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시험 위주로 공부하여 나온 성적은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와 삶의 판단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낙후된 교육환경은 왜 지속되는가? 이것의 문제요인은 주로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교육관료들: 초중등 학교의 현실에 너무 어둡고 교육투자에 지나치게 인색하다

 

첫째, 일단 교육당국자들이 과다한 학급당 학생수, GNP 대비 낮은 교육투자가 어떤 양상으로 현장교육을 척박하게 만드는지 절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학급당 학생수가 15~20명을 넘으면 수업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학생들의 자제력과 교사의 통제력은 상실되기 시작한다. 수업을 질적으로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10여년 전에 프랑스 고교생 10만여 명이 학급당 학생수 25명이 많다고 거리시위를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교사들 3만여 명이 가세하여 다시 집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연이어 2년째 전국 단위 대규모 시위에 대해 정부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당국은 학생과 교사들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투자를 약속했다. 그래서 현재 평균 20명 선으로 줄었다.

 

한국은 대도시 지역의 경우 학급당 36~45명으로 거의 방치상태다. 정부와 적지 않은 교육관계자들이 교사 개인이 우수하고 실력이 있으면 ‘교실혁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화다.

 

이른바 ‘교실혁명’은 학생수가 적을 때, 교사의 수업시수가 주당 14시간 정도, 맡은 행정업무가 거의 없을 때, 승진하면 교직에서 성공한 것이라는 편견이 사라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교육투자가 이뤄져 소규모 학급을 만들면 ‘배우고 싶은 욕망과 가르치고 싶은 열정’이 저절로 살아나게 된다.

 

요즘 각급 학교에 배치되어 있는 원어민 교사들의 한곁같은 반응은 과밀학급이라서 가장 기초적인 회화 이외에 더 이상 세부적인 생활영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어민을 통한 회화교육은 투자된 만큼 결실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의 교사들은 행정서류를 거의 만지지 않는다. 미국의 한 소규모 학교에서는 행정보조원이 교사정원보다 많으며, 러시아의 톨스토이 학교에서는 행정담담, 학술-교수담담, 행사담당, 촬영 및 기록담당 교감 4명이 학생과 교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교사들이 수업에 전념할 조건이 그만큼 갖춰져 있는 것이다. 한국의 교사들은 결재서류를 들고 이러저리 분주히 다니는 풍경을 자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20여년 지내고 나면 교사들은 가르치지 않고 학교를 관리하는 직책인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교사들의 승진욕망은 바로 열악한 교육환경을 방치하는 정부가 조장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교육환경 개선은 장기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을 들여야 한다.

 

장관의 임기가 거의 대통령의 임기와 함께 할 정도로 바뀌어야 하는 등, 정권의 변동에 관계없이 교육투자와 제도적 개선이 일관성있게 이어지는 국정철학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단기 실적을 내고 정치생명을 이어가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최근 정부에서, 교사들이 승진점수를 따느라고 수업에 진정으로 직결되는 교과연구와 독서를 소홀히 하는 오랜 폐단을 시정하고자 점수경쟁을 하지 않고도 교장을 할 수 있도록 방안을 내놓았다. 교육행정 전공 3년제 전문대학원을 졸업하면 3-40대에도 교장이 되도록 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이는 일단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평교사로서 보람을 느끼도록 교육환경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 정책 역시 미봉책으로 귀결될 것이다.

 

교사들 1 : 교육모순에 한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각자 흩어져 있다

 

정부의 무능과 단기 실적위주의 정책남발의 관행을 막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단결된 저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교사들은 각기 흩어져 있다. 최근 학원가에서 선거자금을 지원받아 대가성 여부가 법원판단에 맡겨진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에 대해 퇴진서명이 진행중이다. 서울시 교육감의 행보가 전국 교육감들의 교육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이 사안은 서울시민과 교사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여기서도 교사들은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보수성향의 교사들이 개혁성향의 교사들에 불필요하게 거리감을 두고 있다. 이는 서양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창조는 갈등과 투쟁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너무 생소하기 때문이다. 즉 안정에 집착하면서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지난 11월경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초등학교를 정년퇴임한 김용택씨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집단 중에 교사들이 있으며, 교원승진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교직사회는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교사들은 교원단체 소속 여부를 가리며 교육정책의 모순에 대해 토론하며 저항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 분열의 기제는 바로 정서적, 도덕적 평가이다. 개혁성향의 교사들에 대해 거칠고 예의없다는 편견으로 처리하며 일반화시킨다. ‘교사는 점잖고 착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같지 않다는 ‘동일성’의 논리에 집착하며 거리를 둔 채 교사들 각자는 흩어져 있는 것이다. 이 분열은 곧 비민주적이고 비전문적인 교육행정가의 출현의 온상이 된다. 마치 시민의식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의 국민이 독재자가 출현하는 터전을 만들어내듯이.

 

캐나다의 경우에도 교사들이 교직에 들어오면 이내 대다수가 교원노조원이 된다. 그만큼 노동자로서 계약적인 사고에 충실하다. 그래서 학생을 위해 수업준비에 전념하고, 노동조건 즉 교육환경이 열악하면 국가와 맺은 계약의 불성실한 이행을 문제삼으면서 국가에 대해 투자와 개선을 요구한다. 여기서 교사를 ‘노동자’로 규정하는 방식이 학생에 대한 교육력을 제고하도록 역동적으로 촉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둘째, 교사들이 담임교사, 젊은 교사, 교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는 교사를 제외하고 상당수의 교사들이 수업 빈 시간에 끊임없이 독서하고 교과탐구에 전념해야 한다는 당위적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사들이 수업 빈 시간에 주로 인터넷 쇼핑몰 둘러보기, 유학간 자녀나 결혼을 앞둔 자녀와의 전화, 동료와의 상시적인 사담(私談)을 나누고 있다. 교사들이 이러한 사적인 것과 수업준비하고 독서하는 공적인 것을 혼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가 교육환경을 개선하지 않은 요인 이외에 다른 원인은 무엇인가?

 

교사들 2 : 교사들은 가르치고 책읽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교사들의 투철한 교육적 신념이 실종된 사회적 요인은 가족중심주의, 결혼중심주의, 연장자 중심 등의 관습으로 추정된다. 학교에서 생활이 삶의 주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주된 초점이 가족에 모아져 있다. 그래서 학교전화로 가족에게 전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 시간에 교사의 책읽기와 학생상담은 실종된다.

 

미국의 학교에서 교사들이 사적으로 학교전화를 이용하면 동전까지 계산하여 지불하기도 한다. 열정을 갖고 교직생애를 다할 때까지 수업자료 편집, 독서 등을 통해 실력을 연마하는 모습이 사라진 상황이 지속되면 교원평가는 더욱 힘을 얻을 수 밖에 없다.

 

내 자녀만을 해외로 내보내면 되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이 발전해야 해외의 교포들도 그 나라에서 정치, 법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며 이는 우리의 교육 경쟁력이 강화되어 장기적으로 국력이 신장될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교사들이 먼저 변해야 하고 또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개혁의 시발점이다. 개인이든 단체를 통해서든, 집회든 서명이든 뭉치며 정부에 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의 교사들이 잃어버린 표현의 권리를 되찾는 길이다. 아울러 교사들 내부에서도 건강한 토론을 통해 서로를 비판에 겸허히 드러내며 스스로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에 놀라 도덕적으로 응수하지 말고 비판을 반겨야 한다.

 

 

Posted by 지오별